소니를 명실상부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장본인인 오가 노리오(大賀典雄) 前회장이
지난 23일 오전 9시 도쿄 시내 한 병원에서 81세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하워드 스트링거 소니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소니가 음악, 영화, 게임에 이르는 제품을 만들고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사로 발전한 것은 그의 예지력과 비전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그에 대해 회고하였습니다.
또한 “오가 회장은 일본의 다른 기업들이 해내지 못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기업으로 소니를 키웠다”라고 말했는데요.
이렇게 소니의 발전에 이바지 했던 오가 노리오 前회장은 처음에 오페라 성악가를 꿈꾸었다고 하는데요, 회사 공동 창업주인 이부카 마사루(井深大.1908∼1997)와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1921∼1999)의 설득에 음악과 일을 병행한다는 조건으로 소니에 입사했다고 합니다.
도쿄예술대학 출신의 바리톤 가수였던 그는 입사 첫해인 1959년 부장으로 발탁됐지만 입사 이후에도 한동안 바리톤 가수로 활동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오가 전회장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자동차의 양쪽 바퀴라는 믿음을 앞세워 테이프 레코더나 TV 같은 하드웨어 기기뿐 아니라 음악과 영화 같은 소프트웨어를 함께 개발해야 브랜드를 소비자들의 생활 속에 침투시킬 수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금을 울리는, 소니다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1982년부터 1995년까지 소니의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소니를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켜 글로벌 기업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왔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가 전회장의 음악적 예술성과 소리에 대한 예리한 감각은 이후 콤팩트디스크(CD) 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소니는 필립스사와 CD 공동 개발에 나섰고 1982년 소니가 먼저 상용화를 시키게 되었습니다.
당시 오가 전회장은 “CD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고 75분짜리 규격을 고집했으며 75분짜리 CD 규격은 현재까지 CD 표준 규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89년 미국 컬럼비아 영화사(현재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를 34억 달러에 사들였으며, 전자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을 성공시키며 소니의 사업 다각화를 이끌어냈습니다.
그의 시각 디자인과 마케팅에 대한 깊은 이해는 지금의 소니 로고를 창안하는 데 이바지했는데요.
소니는 “오가 회장은 소비자들의 눈에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제품 출시를 열정적으로 옹호했고 이러한 원칙은 소니의 디자인과 기술을 대표하게 됐다”면서 “소니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성공하는데 주요 전략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오가 전회장은 소니의 사업 분야를 음악·영화사업으로 확대해 소프트웨어(콘텐츠)와 하드웨어(기기)를 총괄하는
국제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으로 평가되며 1995년 회장, 2003년 명예회장을 거쳐 2006년부터 돌아가시기까지
고문을 맡았습니다.
또한 음악가로서의 피가 흘렀던 오가 전회장은 대학 시절의 꿈을 끝까지 놓지 않고 소니의 기업활동 외에도
도쿄 필하모니교향악단과 베를린 필하모니교향악단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과도 깊은 우정을 나눴다고 하는데요. 폰 카라얀은
오가 전회장을 ‘부조종사’로 불렀고 오가 회장은 폰 카라얀을 ‘나의 대장’이라고 호칭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1999년에는 도쿄필 회장에 취임했고, 2003년에는 소니로부터 받은 퇴직금을 일본 휴양지인 가루이자와에
콘서트홀을 짓는데 기부했습니다.
다음 달 4일 이곳에서 동일본 대지진의 이재민을 지원하기 위한 도쿄필의 공연을 지휘할 예정이었지만
이제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됐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네요.
소니를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세우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한 오가 노리오 회장께 애도의 뜻을 표하며,
그의 모험정신을 본받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