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거치형 헤드폰 앰프 TA-ZH1ES를 끝으로 시그니처 시리즈를 구성하는 제품들을 모두 만나보셨습니다. 오디오 전문 칼럼니스트 오승영 님의 디테일한 설명 덕에 자칫 어렵게 느껴졌을 수도 있는 시그니처 시리즈 제품들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간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갈무리 할 수 있는 오디오 칼럼니스트 오승영 님이 전하는 시그니처 시리즈의 총평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 시청을 위해 시그니처 시리즈 세 가지 제품을 서로 다른 조합을 구성해가며 시청을 진행했으며 번들 케이블로 시청을 마친 후, 동봉된 킴버의 옵션 케이블로 최종 시청을 했다. 시청은 MDR-Z1R 헤드폰과 TA-ZH1ES 헤드폰 앰프의 조합을 우선 진행한 후, WM1Z로의 시청을 거친 후에 전체시스템으로 확장해나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청은 역시 헤드폰과 헤드폰 앰프로 진행되었으며, 이 조합을 통해 이 시스템 및 각각의 성향이 확인되었다.
MDR-Z1R + TA-ZH1ES
MDR-Z1R은 미세하지만 음압이 약간 높게 느껴진 것은 밸런스단의 출력수치가 주로 반영되어 나타는 현상 같았지만 크게 특이사항은 없었다. 고출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하이게인으로 스위치를 올려보긴 했지만 게인을 굳이 high로 하지 않고 대부분의 곡들을 시청하기에 충분했다.
HE400i를 포함해서 필자가 알고 있는 100만원을 전후한 베스트셀러 헤드폰들의 일반적인 퍼포먼스를 감안해본다면 MDR-Z1R은 확연하다고 할 만큼의 재생 품질을 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내용물은 뛰어난 스테이징이다. 스테이징은 하이파이 시스템에 비해서 헤드폰으로서는 무대의 사이즈 구현에 태생적 한계가 있고 조금 다른 형태로 구사되곤 하지만, Z1R은 약간 놀라울 정도의 무대를 그려낸다. 습관적으로 헤드폰 시청을 하는 경우 머리를 숙이고 메모를 하면서 음악을 듣게 되는데(헤드폰 평가를 위한 시청시의 장점이다), 순간 고개를 들게 되었다.
24/96 FLAC(MQS)으로 Linn 레이블의 존 버트 지휘, Dunedine Consort & Players 가 연주하는 바하 B단조 미사 중 ‘Domine Deus’를 듣기 시작하면 연주 공간의 모습이 순간 머리 속 가득 떠오른다. 종종 좌우폭에 한계를 갖는 헤드폰 이어폰의 성능을 뛰어넘는다고도 할 수 있겠다. 목관과 현악연주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좌우구간의 프레즌테이션이 정교하고 입체적으로 이루어지며 악기의 울림이 있을 때마다 공간의 사이즈를 쉽게 떠올린다. 특히 이 곡에서 마치 팝업북을 연상케 하는 음상이 중앙에 집중될 때의 입체적 스테이징은 좀더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독창자가 등장하면 콤팩트한 이미지로 선명한 외곽선을 그려낸다. 밀폐의 품질과 앰프의 노이즈 억제력이 커플링되어 만들어내는 품질로 보이는데, 이 곡의 차분한 배경과 그에 따라 나타나는 미세한 다이나믹스가 상당히 명쾌하게 나타나면서 청각적 쾌감을 준다. 머리를 막 감고 나서 말린 후의 청량감처럼 맑은 기분을 쉽게 고조시킨다. 컨트라스트를 강하게 입히지 않으면서도 포근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 어딘가 헤드룸을 남긴 여유가 있어 보이고 에너지가 말단까지 관여하며 살짝 살집이 붙어있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둔탁한 에너지가 아니고 음결은 오히려 섬세한 쪽이다.
24/96 WAV 파일로 인터스텔라의 OST 중에서 ‘Cornfield Chase’를 들어보면 이 제품의 대역과 다이나믹스의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곡에서는 풀 사이즈 하이파이 스피커에 준하는 대역이 느껴진다. 풍부한 스트록과 슬램이 큰 스케일 속에서 강렬하게 바닥을 치고 사라진다. 녹음 자체가 내추럴하다거나 뛰어난 해상도를 특징으로 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눈앞을 가득 채우는 이 곡의 특징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속에서 위력적으로 잘 구사한다. 이 곡을 듣는 동안 떠오른 생각은 조금 더 확장시킨다면 한 밤중에 전쟁영화를 보기에도 아주 좋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호쾌하고 강렬하면서도 음량이 큰 상황에서도 미세한 약음 재생이 침착하게 이루어진다. 신디로 연주하는 작은 차임벨과 같은 섬세한 음이 큰 음량에서도 묻히지 않고 또렷히 들려서 한편으로 이 곡에서도 품질 좋은 입체감이 떠올랐다.
다이아나 크롤의 ‘How Insensitive’를 들어보면 이 제품이 모니터도 아니고 다이나믹을 무기로 하는 제품도 아닌 것이 쉽게 확인된다.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소위 ‘재지’해졌다. 심벌즈와 트럼펫이 공간 속에 번지기 시작하면서 작은 무대가 꽉 찬 공기로 채워졌다. 베이스는 위력적이고 강렬하고 짙은 콘트라스트가 눈 앞을 채운다. 다이아나 크롤의 보컬이 입을 열자 전체 무대가 보다 구체적인 레이어를 갖추고 실제의 상황이 되었다. 베이스의 음량이 충분하면서 부스팅이 생기기 직전까지 부풀곤 했다. 윤기가 흐르고 음색의 미묘한 변화가 수시로 잘 전달되어 현장의 느낌이 잘 재현되는 본연의 품질이 잘 살아났다. 이 곡에서는 다이아나 크롤의 머리 사이즈가 약간 크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혹시 ZH1ES의 출력이 다소 높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입체감에 상관없이 좀더 콤팩트하게 나타난다면 가장 좋은 상태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시청자에 따라서는 이런 근거리에서 타이트하게 채우는 음상을 좋아할 수도 있겠다. 이 조합은 음악적으로 쇼맨십을 구사한다거나 해서 처음부터 시청자를 사로잡거나 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음악적으로는 오히려 온화하고 포근한 쪽에 가깝다.
MDR-Z1R + WM1Z
WM1Z에서 음악을 듣기 시작한 순간 이 제품을 먼저 시청하는 게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출력이 다소 낮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볼륨을 올려서 시청을 했고 다이나믹스가 축소되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지만 TA-ZH1ES가 얼마만큼 확장 되었는지 좀더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WM1Z로는 클래식과 일반 음원의 볼륨을 다르게 시청하는 게 적당했다. 소스의 음압 편차가 좀더 극명하게 느껴졌다. 필자의 경우 클래식은 100으로 일반 음원은 80 정도가 적당했다.
음악의 재생품질로 보아 WM1Z로의 시청이 ZH1ES에 비해 위화감이 있다거나 하지 않았던 것은 거의 같은 스타일과 품질로 들렸기 때문이다. ZH1ES에서 시청한 음원들을 그대로 SD메모리로 옮겨 시청했는데 사실 별로 할 얘기가 없을 만큼 동일한 상태로 들렸다. 다만 주목할 것은 ZH1ES로의 시청은 전원을 연결한 재생이었고 WM1Z의 경우는 배터리 전원으로 이동하면서도 시청할 수 있는 상태로의 재생품질이다. 참고로 배터리 용량이 얼마 남지 않아서 충전 메시지가 떴을 경우에도 시청의 품질은 거의 동일했다. 이런 부분이 기타 모바일 기기와는 다소 다른 고해상도 전용플레이어의 면목이라고 생각되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기기를 시청할 좀더 많은 시간이 있었다면 블루투스와 4가지 모드의 업스케일링, 6개의 위상 필터링 모드 등을 테스트해봤을 텐데 다음 기회를 통해야 할 것 같다.
서두에 킴버 케이블에 대한 언급을 잠시 했지만 당연하게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 이 제품의 만듦새나 등급으로 보아서는 킴버가 아니더라도 번들 케이블보다는 좋은 선재를 사용할 것을 권하고자 한다. 아마 제조사측에서도 케이블에 대해서는 사용자의 자율적인 반응을 반영해서 번들 케이블의 등급을 책정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품의 가격은 좀더 올라갔을 것이다. 킴버 케이블로 시청을 하면 무엇보다 단정하고 응집력 있는 베이스가 눈에 뜨인다. 간략히 말해서 킴버 케이블의 경우가 되면 대부분의 곡에서 정숙해지고 선명해진다. 종종 베이스 해상도라고 표현하는 이 품질은 악기의 숫자와 대역이 넓은 곡일 수록 편차가 커진다. 스테이징의 묘사가 좀더 입체적으로 변하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본 제품의 시청을 위해 가능한 사운드 콘셉트에 위화감이 없는 등급의 제품을 비교시청용으로 사용했다. 소스로는 맥북프로와 아이폰 7플러스를, 헤드폰으로는 하이파이맨의 HE400i를, DAC로는 바쿤의 DAC21과 NuPrime의 DAC-9을, 헤드폰 앰프로는 NuPrime의 HPA-9과 오렌더의 Flow V1000을 통해 비교 시청했다.
에필로그 - 음악의 품격을 위해서
이 세가지 제품은 서로간 팽팽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어서 사운드 컨셉상 최적의 매칭 파트너 이전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부속물이 될 수 없는 삼총사이자 시너지 파트너가 된다. 이번 시청을 하는 동안 새삼 필자가 파악하게 된 것은 이 제품들의 효과적인 퍼포먼스를 위해서 소니는 대부분의 내부회로와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제조했다는 사실이다. 소니 전용의 보정회로와 증폭단, 다양한 프로세싱 등이 그렇고 집집마다 공유하기에 바쁜 DAC칩이나 FPGA 프로세서, 그리고 운영체계까지도 모두 소니만의 전용시스템으로 동작하고 있다.
이런 긴밀한 연계 시스템을 갖추었음에도 외형적으로 보아 굳이 작위적인 일체감을 입히는 등의 무리를 하지 않아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환영하는 바이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개별 컴포넌트로도 패키지 조합으로도 자연스러운 사용이 가능해진다. 커플티와 같은 일체감의 흥미는 종종 그리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제품의 이름이 다소 어렵다. 소니의 오랜 네이밍 정책이긴 하지만 시그니처 라는 타이틀을 만들었다면 각 제품에도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만의 문제인지 2주간 시청을 하면서 아직도 제품의 알파벳과 숫자 조합이 서로 뒤바뀌는 경우가 있어서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렵다. 특히 구매를 고려하는 소비자에게는 좀더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얼마 전 창립 70주년을 맞은 소니는 각 부문마다 추격을 해오는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서 젊은 시절의 체격보다는 왜소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마치 새 살이 돋아 오르듯 신사업 부문을 키 드라이버로 하는 소니의 신 조류는 80년대만큼이나 눈에 뜨인다. 알파 시리즈로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카메라 부문에 부응해서 시그니처 시리즈가 하이파이 시장에 큰 걸음을 내딛으며 그 뒤를 바짝 잇고 있다. 소니의 사운드 브랜드가 카메라의 경우와 느낌이 다른 건 대략 50년간 누적된 관록의 무게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해외에서의 화제와 무관하게 국내매장에서는 구경 조차 할 수 없었던 제품들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주듯 온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로 선을 보인 시그니처 시리즈는 그래서 유례없이 반갑게 다가온다. 하지만 소니가 시그니처 시리즈를 분기점으로 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거나 뭔가 기존과 다른 전기를 마련했다거나 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가 알고 있는 소니는 원래 감성적으로 어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브랜드였다. 음향기기를 제작하는 회사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음악 라이브러리를 갖추고 있는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음악이 어떻게 들려야 하는 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제조사라고 할 수 있다.
시그니처 삼총사는 음악 듣는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기존에 익히 들어왔던 음악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될 것이며, 음원의 종류를 막론하고 새로 나온 음원들에 관심이 생기게 할 것이다. 그래서 사용자라면 음악 듣는 시간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아마 이 소리는 집 밖에서도 생각이 날 것이다. 그래서 이동 중에도 시청을 할 수 있도록 제품 구성을 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성능 면에서 뛰어난 제품이기도 하지만 취향 편차가 크지 않도록 제작되었다는 점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어딘가에서 이 제품이 보인다면 신중히 시청할 것을 권한다. 아마 집으로 들고 오게 되거나 돈을 마련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먼저 들여놓을 건지 생각해보면서 말이다.
이것으로 장장 4부에 걸친 오디오 전문 칼럼니스트 오승영 님의 시그니처 시리즈 리뷰가 끝이 났습니다. 시그니처 시리즈의 진면목을 아시게 된 시간이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